
2026년 3월 5일 저녁 6시,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열기는 차가운 초봄의 공기를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했습니다. '농생태학(Agroecology)'이라는 다소 생소하고도 묵직한 학문을 함께 공부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100여 명의 참가자는 각자의 현장에서 느꼈던 농업의 한계와 희망을 품고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이번 첫 모임은 세계적인 농생태학자 스티븐 글리스먼(Stephen R. Gliessman)의 저작을 바탕으로,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먹을거리 체계의 근본적인 모순을 진단하고, 농업을 '공장'이 아닌 '생태계'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시도했습니다.
지속 불가능한 풍요의 시대, 왜 지금 농생태학인가
발제를 맡은 아메바는 산업형 농업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포문을 열었습니다. 우리가 마트에서 손쉽게 만나는 풍요로운 먹거리 뒤에는 토양 유기물의 고갈, 전 세계 담수 사용량의 70%를 차지하는 관개 문제, 유전적 다양성의 상실이라는 거대한 희생이 뒤따르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습니다. 특히 "동식물을 작은 공장의 부품처럼 취급하고, 유전자 조작과 환경 통제를 통해 효율성만을 극대화해온 산업형 농업 체계는 이제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진단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냈습니다.
스터디의 전반부에서는 '지속 가능한 먹거리 체계'를 위한 9가지 지표가 제시되었습니다.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고, 외부 투입재(농약, 비료 등) 대신 농업생태계 내부의 자원 순환에 의존하며, 사회적 정의와 식량권을 보장하는 체계. 이것이 바로 농생태학이 지향하는 미래입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대안을 넘어, 생산자와 소비자가 '푸드 시티즌(Food Citizen)'으로서 새롭게 연결되는 사회 변화를 포함하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공장에서 생태계로, 관점의 전환이 가져온 신생 속성
두 번째 장에서는 농업을 생태계의 원리로 이해하는 학문적 기초를 다루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뜨거운 키워드는 단연 '신생 속성(Emergent Properties 창발적특성, 창발성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번역자의표현을 그대로 썼습니다.)'이었습니다. 개별 작물 하나가 가진 특성의 합보다, 그들이 모여 상호작용할 때 발생하는 전체 생태계의 능력이 훨씬 크다는 개념입니다. 참가자들은 주류 농업 연구가 개체별 영양 상태에만 머물러 있는 사이, 농생태학은 그들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며 저항성과 탄력성을 만들어낸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 흐르지만 양분은 순환해야 한다는 생태계의 원칙은, 수확이라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밖으로 에너지를 내보내기만 하는 농업 현장에서 우리가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특히 '동적 평형'이라는 개념을 통해, 끊임없는 교란 속에서도 스스로를 복구해나가는 자연의 리듬을 농업에 어떻게 이식할 것인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100명의 목소리가 빚어낸 치열한 조별 토론의 현장
강의가 끝난 후 이어진 조별 토론은 이 스터디의 정점이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주체들은 각자의 슬라이드를 채워가며 이론이 실제 삶과 부딪힐 때 발생하는 불꽃을 나누었습니다.
1조는 자연농의 실천 경험을 통해 벌레와 생명을 대하는 감각이 확장되는 과정을 '관계로의 전환'이라 정의했습니다. 마당의 낙엽과 음식물 쓰레기를 퇴비화하는 작은 실천이 어떻게 농생태적 감각의 회복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쏟아졌습니다.
2조는 '신생 속성'이라는 개념에 주목하며, 자연을 닮은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그 사이 전업농들이 겪어야 할 생계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거미와 고양이가 돌아오는 밭을 보며 살아있음을 느꼈다는 감동적인 경험 뒤에는, 인증제도나 정부 지원의 부재라는 벽이 여전함을 토로했습니다.
3조에서는 "과연 농생태학으로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라는 도발적이고도 본질적인 질문이 나왔습니다. 이에 대해 무한한 물질적 풍요가 아닌 '충분함'과 '한계' 내에서의 생산이라는 철학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깊이 있는 통찰을 나누었습니다.
4조는 도시농업의 현장에서 마주하는 '미학적 갈등'과 농생태학적 적용의 어려움을 진솔하게 나누었습니다. 생태적 방식이, 주변 이웃들에게는 자칫 '게으름'이나 '지저분함'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단순한 기술을 넘어 이웃과 소통하고 설득하는 '문화적 실천'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도시가 농생태학의 중요한 실험실이 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5조는 물 남용 문제와 '무경운'에 대한 고민을 이어갔습니다. 다큐멘터리 <대지에 입맞춤>을 통해 농생태학에 입문했다는 사례부터, 빗물을 활용한 농업과 기후 위기 대응 방안까지 현실적인 대안들이 논의되었습니다.
6조는 '살아있는 경관'과 '해충'에 대한 인식 변화를 논했습니다. 식량 증산을 위해 해충을 박멸해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생태계의 자정 작용 사이에서의 갈등, 그리고 통제 불가능한 환경을 가진 농업이야말로 '공장'이 아닌 '생태계'여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7조는 도시농업 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언어화'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농부들의 지혜가 학문의 장에서 정당하게 대우받기 위해서는 쉬운 언어로 시민들과 공유되어야 하며, 특히 "우리가 먹는 행위가 어떻게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묵직한 화두를 던졌습니다.
8조는 '푸드 시티즌'으로서 소비자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장마로 인해 기존의 농사 데이터가 무용지물이 되는 환경에 대한 두려움을 공유하면서도, 생태계의 자정 능력을 믿고 기다렸을 때 천적이 해충을 해결해준 경험을 나누며 '신뢰'의 가치를 재발견했습니다.
리좀적 연결의 시작: 농생태학이 그리는 새로운 지도
8개 조가 발표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농생태학은 단순히 '농사짓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관점의 전환(공장에서 생태계로), 주체의 확장(농민에서 푸드 시티즌으로), 그리고 관계의 복원(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의 상생)을 아우르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형성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책은 어렵지만, 현장의 이야기는 뜨겁다"고 말입니다. AI 데이터 센터가 물을 삼키고 기후 위기가 농사 달력을 뒤흔드는 시대에, 우리가 농생태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단순히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견뎌낼 '탄력성'을 우리 공동체 안에 심기 위함입니다.
이번 첫 스터디는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100여 명의 주체들이 고정된 위계 없이 수평적으로 연결되는 '리좀(Rhizome)'적 연결의 시작이었습니다. 도시농부의 텃밭 상자와 전업농의 드넓은 논, 그리고 시민들의 밥상이 농생태학이라는 보이지 않는 뿌리로 얽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공부가 거듭될수록 이 연결은 더욱 단단해질 것입니다. 다음 모임에서는 식물과 환경의 비생물적 요인을 다루며, 우리가 흙과 물, 햇빛과 맺는 관계를 더욱 미시적으로 들여다볼 예정입니다. "농생태학은 피할 수 없는 길"이라는 아메바의 마지막 갈무리처럼, 100명의 탐구자는 이제 지속 가능한 먹거리 체계라는 지도를 함께 그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치열한 공부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할 세상은, 아마도 지금보다 조금 더 푸르고 훨씬 더 생기 넘치는 생태계일 것입니다.
2026 농생태학 공부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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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생태학 공부 모임 | Notion
🌾 밥상 위의 생태학: 기후 위기 시대, 농생태학으로 여는 지속가능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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