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생태학 스터디] 하늘바라기, 다시 배우는 중
농생태학 스터디 3회차 — 물·바람·불의 생태학
우리가 잃어버린 건 기술이 아니라 감각이었다.
어릴 때 가평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나. 그해 처음으로 경운기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그 전까지는 아버지가 소를 몰아 밭을 갈았다. 손모내기도 봤다. 동네 어르신들이 며칠 날 우리 논, 며칠 날 옆집 논, 순서를 정해서 돌아가며 품앗이를 했다. 뒷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썼고, 논 도랑을 함께 치고, 내 논의 물이 넘치면 옆 논으로 흘러가게 했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양수기로 각자 퍼 올린다. 공동 작업이 개인 작업이 됐다.
농생태학 스터디를 하면서 그 기억이 자꾸 올라온다.
이번 장은 좀 쉽겠지, 했는데
3회차 주제는 물, 바람, 불이었다. 발제를 준비하면서 솔직히 이번엔 좀 수월하겠다고 생각했다. 앞선 두 번보다 학문적으로 어렵지 않은 장들이라. 그래서 발제를 짧게 끊고 토론 시간을 넉넉하게 잡기로 했다.
막상 열어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6장은 습도와 강우다. 공기 중의 수증기가 이슬점에 도달하면 물방울이 된다는 것, 비가 내리는 세 가지 방식(대류성, 지형성, 태풍성), 강수 패턴의 다섯 가지 특성. 이런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핵심에 다다른다.
"맞서기보다 적응하는 농생태 설계."
책에는 이걸 '하늘바라기농법'이라고 불렀다. 우리말로는 천수(天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 배수 시스템을 갖추고 인위적으로 물을 통제하는 대신, 그 땅에 내리는 비의 패턴에 농법을 맞추는 방식이다.
멕시코 사례가 인상적이었다. 침수가 반복되는 땅에서 굳이 물을 빼내지 않고, 수위가 낮아지면서 드러나는 땅에 파종하고, 습지 풀을 베어 유기물 깔개로 덮고, 그 위를 태워 재로 만들고, 씨앗은 타지 않고 발아하는 그 순서. 기계식 배수농법보다 수확량이 세 배에서 여섯 배 높았다고 한다. 토양 유기물이 항상 높고, 질소 함량이 유지됐기 때문이다.
토론에서 더 많이 배웠다
발제가 끝나고 네 개 조로 나뉘어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엔 조별 인원이 적어서 오히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제주 밭담 이야기가 나왔다. 돌밖에 없는 땅, 바람이 강한 섬. 거기서 나온 밭담이 방풍이기도 하고, 돌을 치우는 작업의 결과물이기도 하고, 경계이기도 하다. 교재에서 배운 방풍림의 원리가 제주에 이미 있었다.
의성 수리계 이야기도 나왔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마을 단위 물 관리 공유재. 다랑이논의 관개 원리가 그대로 살아 있는 곳. 책에서는 멕시코와 캘리포니아를 예로 드는데, 우리도 이미 하고 있었다.
양평에서 농사를 짓는 한 참여자는 경사지에 스웨일 역할을 하는 자연 지형이 있었는데, 그냥 냅뒀다고 했다. 지난 폭우 때 그게 그대로 작동하는 걸 봤다고. 물을 막고, 스며들게 하고, 저장까지 해줬다고.
호미질 이야기도 나왔다. 어르신들이 습관처럼 반복하던 그 동작이 사실은 모세관 현상을 끊는 작업이었다는 것. 흙 표면을 살짝 일궈주면 아래에서 물이 올라와 증발하는 경로가 차단된다. 할머니들이 그 원리를 말로 설명하지 않았을 뿐이지, 몸으로 알고 있었다.
불에 대한 오해를 좀 풀었다
10장은 불이었다. 사실 농업과 불을 연결해서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논두렁 태우기 정도가 떠오를 뿐이었다.
책에서 불을 세 가지로 나눈다. 낙엽이나 잔물이 타는 지표화, 나무 수관을 타고 번지는 수관화, 땅속 유기물이 속으로 타들어가는 지중화. 지중화는 처음 들었다. 연기가 땅 밑에서 난다.
토론에서 가장 많이 나온 반응은 화전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화전은 산을 망가뜨리는 방법이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제대로 된 화전은 10년에서 25년 주기로 구역을 돌아가며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그사이 식생이 회복된다. 불이 지나간 땅은 일시적으로 알칼리성이 되고, 칼륨과 칼슘이 유입되고, 박테리아가 빠르게 증식한다. 다음 작물이 바로 그 지력을 쓴다. 순서가 있었다.
"화전에서 배울 게 너무 많다"는 말이 여러 조에서 나왔다.
하나 더. 딱정벌레를 잡아서 바로 태우지 않고, 천천히 열을 가하면 위험 신호 페로몬을 방출해서 다른 개체들이 접근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걸 방제에 활용한다. 교재에 없으면 평생 모를 이야기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
토론이 끝나고 조별 발표를 들으면서 한 가지 흐름이 느껴졌다. 책은 멕시코와 캘리포니아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참여자들은 자꾸 한국 이야기를 꺼냈다. 제주 밭담, 의성 수리계, 다랑이논, 고래다 심기, 스웨일을 닮은 자연 지형.
농생태학이 어딘가 먼 나라의 학문처럼 느껴지다가도, 토론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면 달라진다. 우리가 이미 하고 있었다. 그냥 그 언어로 설명하지 않았을 뿐이다.
한 참여자가 말했다. "전통적인 농생태학의 경험과 지혜들을 모아서 새롭게 재편해주면 좋겠다."
맞는 말이다. 이 스터디가 쌓이다 보면 그런 정리가 자연스럽게 될 것 같다. 아직은 조각이 흩어져 있지만, 조각이 모이면 그림이 된다.
4회차 주제는 토양과 토양 속의 수분이다. 2부의 마지막이다.
토양을 아예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방심하기 딱 좋다. 이번에도 새로운 개념들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이미 마음 준비를 하고 있다.
토양이 끝나면 드디어 3부다. 지금까지는 물, 바람, 불, 토양을 하나씩 뜯어봤다. 3부부터는 이것들이 한꺼번에 엮인다. 서로 연결되고 상호작용하고, 농업 생태계 전체로 시야가 넓어지는 지점이다. 복잡해지는 만큼 재미있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조각들을 모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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