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작과 혼작
안철환 (전통농업연구소 대표)
흙에서 살며 흙을 살리고 내가 사는 제일 중요한 방법은 흙에서 먹을거리를 얻는 일이라 봅니다. 그게 흙과 소통하는 일이에요. 먹을거리를 얻기 위해 흙과 소통하는 방법으로는 경작과 채집이 있어요, 이 둘 다를 농사라 할 수도 있고 경작만 농사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론적으론 경작만 농사일 수 있지만 우리 전통 문화에선 채집도 농사의 한 부분이었지요.
아무튼 이번 글에선 흙에서 살며 흙과 소통하는 것으로 경작과 채집을 얘기하려 하구요, 경작에선 먼저 윤작과 혼작을 살펴봅니다.
얘기에 앞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우리나라의 미개한 농법을 계몽한다는 미명으로 권업모범장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자기들 농학자들을 파견했습니다. 권업모범장은 지금의 농촌진흥청 전신입니다. 그래서 농진청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하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농진청이 원래 있던 자리는 정조대왕이 천도 목적으로 수원 화성을 지으며 관개용수로 서호라는 저수지를 만든 주변 농경지 일대에요. 그러니까 농진청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면 정조대왕이 나오니 권업모범장만 떠올릴 일은 아니죠.
아무튼 권업모범장을 통해 일본의 실력있는 농학자들이 조선에 들어와 조선의 농업을 식민정책에 맞게 식량 공출기지로 바꿔 나가려 했을 때 들어온 사람 중에 다카하시 노보루(高橋 昇)라는 농학박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좀 남달랐습니다. 조선 농법을 살펴보니 들은 바와 달리 미개한 농법이 아니라 일본 이상 가는 지혜로운 농법이라는 걸 간파한 겁니다. 그 중에 이 사람이 크게 평가한 것은 2년3작이라는 윤작법이었습니다. 조선 농부들은 2년에 두 번 농사짓는 게 아니라 세 번 지었다는 얘깁니다. 두 번 해 먹을 걸 세 번 지어먹는다고 토양이 고갈되는 것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반만년 같은 자리에서 농사지어도 지력이 고갈되기는커녕 보존을 넘어 더 증진되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그런데 이른바 녹색혁명, 백색혁명으로 농업을 현대화한다면서 우리 농경지 지력은 반토막이 났습니다. 보리고개를 극복했다지만 땅심은 반토막이 났으니 그게 농업 현대화일까요? *
아무튼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는 사비를 들여 함경북도에서 제주도까지 샅샅이 돌며 조선의 농법과 농민들의 삶을 살펴 본 책을 썼습니다.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란 책이 그것입니다. 1천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책인데 사비를 들여 썼으니 바로 출간을 못하고 죽은 뒤 아들이 유고를 갖고 있다 1983년도에야 민간출판사에서 낼 수 있었습니다.
그 책이 2000년대 들어와 우리에게도 소문이 나면서 복사판 책이 돌았습니다. 해적판이라고 하지요. 그 소식을 들은 다카하시 아들이 꽤나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농진청의 직원 한 분이 그 아들을 찾아가 선친의 유고를 우리 농진청에 기증해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 무조건 거절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을 겁니다. 자세한 경위는 못 들었지만 결국엔 우리 농진청에 기증하기로 결정했어요. 그걸 끝까지 설득한 농진청 직원이나 결국엔 기증하기로 결정한 아드님이나 모두 대단한 분들이다 했어요. 기증식에 저도 가 보고 유고도 살펴보고 그 아드님과도 인사 나누고 기념촬영도 했는데, 점잖고 온화한 인상을 가지신 분이다 싶었습니다.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에게 영향 끼친 미국의 유명한 농학박사가 있었습니다. 프랭클린 히람 킹(Franklin Hiram King)이란 분으로 1909년 한 중 일 3국을 1년에 걸쳐 돌면서 이 지역의 농업을 소개한 책을 썼지요. 휴경하지 않고도 같은 땅에서 4천여년 농사지어 왔지만 지력을 고갈시키지 않고 농사지어 온 동양 농부들의 지혜를 현장을 돌며 파악한 책으로 그 중 앞의 다카하시 박사가 본 윤작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어요. 윤작 중에도 콩을 중심으로 한 작부체계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지요. 거름도 만들어주면서 토양의 물리성도 좋게 해주는 콩을 중심으로 지력을 고갈시키는 작물을 혼작 또는 윤작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지력을 아주 많이 빼먹는 옥수수는 콩 밭 둘레로 심고, 물과 땅심을 엄청 빼먹는 목화는 반드시 옆에 콩을 심는 식입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없던 시절, 배로 몇 달이나 걸리는 태평양 반대편의 지역을 미국의 농학자는 왜 왔을까요? 거름도 주지않고 목화 담배 같은 지력 수탈작물의 거대한 광작(廣作)으로 토양을 망가뜨리고도 그걸 살리려 노력하기보다 서부의 미지의 땅을 개척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 미국의 농업문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였죠. 킹 박사는 윤작 말고도 똥을 비롯한 모든 부산물을 퇴비화하여 땅으로 되돌리는 순환농사, 인위적인 관개시설 없이 천수답 논의 지혜로운 물관리도 소개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미 하버, 보쉬라는 과학자들이 공기 중의 질소를 인위적으로 고정시켜 질소비료를 만드는 기술을 발명하는 바람에 이들의 아이디어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질소비료 생산은 농 기계화와 함께 단작(單作), 광작(廣作), 연작(連作)을 통한 대량 생산체제를 뒷받침하며 농업의 현대화를 더욱 가속화시켰습니다. 그렇다면 농업의 현대화는 토양의 지력도 함께 증진시켰을까요? 아니죠, 농업의 현대화는 토양의 고갈을 속으론 심화시키면서 그걸 임시로 가렸을뿐입니다. 조상들이 물려 준 지력이 뒷받침되었기에 질소비료가 효과를 본 것인데 그걸 애써 외면하다 지력의 고갈이 한계점에 도달하면 질소비료도 아무 소용 없는 때가 올 것이거든요.
땅심을 지켜주는 윤작, 혼작
인삼과 산삼의 차이를 아시죠? 인삼의 원종이 산삼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게 산에서 야생으로 자라면 산삼이고 밭에서 인간에 의해 재배되면 인삼인 것이죠. 그런데 둘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인삼은 같은 자리에서 잘 해야 5~6년 자라고 산삼은 같은 자리에서 몇 십년을 살고 더 오래 살면 가치가 더 높아지죠. 말하자면 인삼은 지력 수탈로 연작피해가 생겨 5~6년밖에 키우지 못하지만 산삼은 그런 게 전혀 없는 거에요, 그래서 그런지 인삼은 6년간 80g 자라는데 산삼이 그만큼 자라려면 60년 정도 걸린다네요.
이 둘의 차이는 다르게 보면 자연산(야생)과 재배(양식)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산은 크게 자라지 않지만 오래 살 수 있고 재배한 것은 크게 자라지만 오래 살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크게 자란다는 것은 수확량이 많다는 것이고 오래 산다는 것은 같은 토양에서 옮기지 않고 연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좀 더 따져볼까요. 사실 수확량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토양을 수탈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토양 수탈이 일정 기간 지속되면 당연히 토양이 망가집니다. 토양이 작물 재배에 의해 수탈된다는 의미는 특정 작물에 맞는 토양의 양분이 편중되게 고갈된다는 것입니다.
특정 작물을 재배하여 많은 수확량을 얻으려면 단작(單作)은 필수입니다. 그에 따라 넓은 면적의 재배, 곧 광작(廣作)으로도 이어지고 계속 한 작물을 심는 연작(連作)도 불가피한 선택이 됩니다. 그리고 과도한 비료 투입과 화학자재 및 에너지도 많이 투입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장기간 재배하게 되면 토양은 산성화되기 쉽고 고투입으로 인한 염류집적도 피할 수 없죠. 더 오래되면 농사가 불가능해지는 지경까지 갈 수도 있고 이미 그 전에 자연 재난에 의한 토양 유실, 침식으로 더 빠르게 망가질 수도 있어요.
반면 산삼이 크기와 수확량은 적더라도 같은 자리에서 몇 십년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전혀 토양을 망가뜨리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수확량이 적다는 것은 토양을 별로 수탈하지 않는다는 얘기와 통합니다. 또 산삼은 군락하지 않죠. 한쪽 구석에 숨어서 몇 포기만 자생하니 찾기 힘든 걸겁니다. 작물로 비유하면 단작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거에요. 주변 여러 풀들과 공생하고 있는 거지요. 작물로 치면 혼작인 셈이에요. 이러니 토양이 수탈되지 않아 앉은 자리에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먹고살아야 할 식량을 구해야 한다는 점에선 산삼 같이 구하기도 힘들고 양도 적은 것을 토양을 수탈하지 않는다는 근거로 무조건 환영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많은 식량을 얻기 위해선 단작, 광작, 연작 방식이 불가피할 수 있습니다만 그 재배방식을 오래 지속하다 토양이 고갈되 결국 아무 식량도 얻을 수 없게 된다면 다수확 방식이라고 무조건 환영할 수 있을까요? 기후위기 시대에 이런 단작 방식은 특히 취약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먹을 식량도 지속가능하게 얻으면서 토양도 고갈시키지 않는 방식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바로 인삼과 산삼 사이에서 찾으면 됩니다. 넘쳐나도록 잉여식량이 많지는 않지만 굶지는 않을 정도의 식량을 얻으면서 토양은 망가뜨리지 않는 방식이죠. 그게 뭐냐고 물어보면 저는 과감히 윤작과 혼작, 그리고 채집이라고 말합니다. 말이 길어져 이의 자세한 방법에 대해선 다음 글로 미루어야 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 통계자료를 보면 1922년경에는 우리 농토의 논토양유기물함량이 4.4%(밭토양3.4%)까지 올라간 때도 있었는데 점점 낮아져 2000년대에 들어와서 2.2%대로 낮아졌다. “친환경농업과 토양유기물 함량”(흙살림연구소:
** 2014년에 같은 이름으로 국내 민속원이란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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